'산란일자 난각표시' 반발 심화 / 201 8년 '살충제 계란 파동' 확산되자 / 정부, TF 구성 20개 과제 대책 마련 /'알 권리' 차원 산란일 표기 확대 공고 / 양계농 "안전성 위해 냉장유통 필수 / 유통온도 낮추고 콜드체인 갖춰야" / 선별포장 의무화 부담 가중.."유예를"
“앞으로는 대규모 양계농장만 살아남을 겁니다. 중소 양계농장은 불법을 저지르거나 문 닫을 수밖에 없어요.” 20년 넘게 양계업에 종사해온 A(56)씨는 최근 중간 유통업자로부터 “계란 구매 물량이 내년에 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하루 평균 30개들이 계란 2500∼3000판을 생산하는 A씨의 농장에는 중간 유통업자가 2∼3일에 한 번씩 찾아온다. 새해 2월23일부터 계란 껍데기에 산란일자가 표기가 의무화하면 생산일자가 빠른 계란 위주로 수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통업자의 설명이었다.
A씨는 “지금도 후장기(계란 가격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계란을 출하하고 월말 시세에 따라 결정된 가격으로 정산하는 방식) 때문에 유통업자가 계란 가격을 후려치는데 산란일자로 계란을 선별해 수거하면 생산자 입장에서는 버틸 재간이 없다”며 “조류인플루엔자(AI)와 살충제 계란 파동 이후 방역과 축사 관리 현대화에 수억원을 투자했는데 더 버티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12월 13일 충북 오송시 식약처 정문 앞에서 시작한 양계농민의 집회가 해를 넘겨 3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란일자 난각 표시’와 ‘계란 선별포장’ 의무화를 반대하는 양계농민 1500여명은 식약처장 면담을 요구하며 정문을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안전한 계란 생산과 유통을 위한 정부의 식품안전 개선 종합대책에 왜 양계농민들은 극렬히 반대하고 있을까.
지난해 12월13일 충북 청주시 식품의약품안전처 앞에서 열린 ‘계란 산란 일자 표기 반대 집회’에 참석한 양계농민 1500여명이 계란판을 쌓아두고 집회를 벌이고 있다. 청주=연합뉴스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등장한 전 세계 최초 산란일자 난각 표기
지난해 8월 네덜란드와 벨기에 당국이 살충제 성분인 ‘피프로닐’이 일부 계란에서 검출됐다고 발표하면서 ‘살충제 계란’ 파문이 시작됐다. 피프로닐은 가축에 기생하는 벼룩이나 진드기 등 해충을 없애는 데 쓰이는 살충제로 세계보건기구(WHO)는 피프로닐을 맹독성 물질로 분류했다. 인체에 일정 기간 많이 흡수되면 간·갑상샘·신장을 손상한다.
국내에서도 같은 달 일부 양계농가에서 생산한 계란에서 피프로닐과 살충제 성분인 ‘비펜트린’이 검출되면서 살충제 계란 파동이 확산했다. 살충제 계란이 확인된 농가가 6곳으로 확대되자 정부는 모든 농가의 계란 출하를 전격 중단하고 3000마리 이상의 산란계를 키우는 농가에 대한 전수검사에 들어갔다. 전수검사 결과 61개 농장의 계란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다. 전체 농가 중 4%에 달했다.
살충제 계란 파동 이후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식품안전관리 개선 TF를 구성, 4대 분야 20개 과제를 선정해 개선책을 마련했다. 과도한 살충제 사용의 원인이 된 사육환경 개선부터 유통 과정 간소화, 생산자 정보 제공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양계농가의 반발을 부른 난각 산란 일자 표기는 정부가 소비자 알 권리 차원에서 6자리 표시를 10자리로 늘리면서 시작됐다.
정부는 지난 9월 ‘축산물의 표시기준 일부개정고시(안)’를 행정예고해 계란 산란일(4자리)과 사육환경 번호를 추가해 10자리로 확대 표기할 것을 의무화, 내년 2월 23일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식약처는 “산란 일자를 의무 표시하는 국가는 없으며 우리나라가 전 세계 최초 시행”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산란일자 표기보다 중요한 건 유통온도… “유통상인 농단만 심각해질 것”
식약처의 개정 고시 후 양계농장들은 “안전한 계란 유통을 위해서는 산란일자보다 냉장유통이 필수”라며 “냉장유통을 위한 콜드체인(저온 유통체계)만 갖추면 계란 유통기한은 최대 2달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 유통 환경 개선 없는 산란일자 표기는 오히려 소비자와 생산·유통업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계란 안전대책 토론회를 주최한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은 “냉장육과 계란은 유통시설과 유통과정의 온도가 유통기한을 좌우한다”며 “미국(7도 이하), 캐나다(4도 이하), 일본(8도 이하)은 유통온도를 10도 이하로 통제하지만 우리나라만 (15도 이하) 유통온도가 지나치게 높다. 이마저도 권고사항이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안전한 계란 생산·유통을 위한 냉장유통의 중요성은 식약처의 2016년 ‘생산 및 유통·소비단계 계란 취급 가이드라인 마련’과 농림축산식품부의 2014년 ‘계란 유통기한 설정 관련 연구’에서 모두 지적됐다. 환경에 따른 계란의 병원균 발생 정도를 연구한 미국 농림부의 병원균 예측 프로그램에 따르면 살모넬라의 경우 3일 지났을 때 10도에서 3CFU/㎖로 미비하게 증식됐다. 반면 15도에서는 동일 기간에 3만1000CFU/㎖로 증식되었고, 20도에서는 5억6000만CFU/㎖로 급격히 증식됐다.
농식품부 연구를 담당한 경남과기대 손시환 교수(동물소재공학과)는 “2∼12도, 25∼32도에서 보관한 계란을 비교했을 때 32도에서는 A등급 계란이 이틀 만에 C등급으로 품질이 떨어졌다”며 “신선란으로 유통하려면 생산된 계란을 이른 시일 안에 저온 유통하고 12도 이하 온도에서 20일 정도까지 보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손 교수는 “산란일자보다 유통온도에 따라 계란 유통기한이 결정되기 때문에 계절별 실외 온도의 차이를 반영해서 계절별 유통기한도 달리 명시할 필요도 있다”고 제안했다.
살충제 계란 파동 전부터 계란 유통 온도를 낮추고 콜드체인을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작 정부의 안전대책에서는 유통온도를 강화하는 내용이 빠졌다. 세척란의 경우 지난 1일부터 15도 이하로 유통하도록 의무화했지만 정작 생산자와 유통업자, 대형마트에서는 저온창고와 냉동탑차, 냉장 판매대를 갖추지 못해 일부 유통상인들은 비세척란을 판매하라고 양계농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홍재 대한양계협회 회장은 “산란일자가 찍히면 유통상인들은 생산 일자가 빠른 계란 위주로 수거하고 오래된 계란은 가격이 깎일 가능성이 높아 생산농가가 제값을 받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며 “유통온도에 따른 유통기한 표시가 소비자 알 권리도 충족하면서 동시에 안전한 계란 유통에 더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식용란 선별포장 의무화 코앞인데, 인증 업체 비율 10% 불과
계란 산란일자 표기와 더불어 식용란 선별·세척·살균·포장의무를 신설한 식용란 선별포장이 오는 4월25일부터 의무화하지만 선별포장을 담당할 계란유통센터 인증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식약처는 지난해 11월 축산물 위생관리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해 식용란 선별포장업 관련 위생과 시설기준 등 세부 규정을 마련했다. 계란유통센터는 생산된 계란을 모아 선별·세척·포장까지 가능한 곳으로 정부는 업계의 자율 포장 대신 영업에 필요한 시설과 안전기준, 세척 방식 등을 통일해 안전기준을 강화했다.
양계농민들도 개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문제는 유통환경이 바뀐 시행령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행령 개정 후 1년1개월이 지났지만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전국 166개 계란유통센터 중 식용란선별포장업 인증을 받은 업체는 17곳으로 10.2%에 불과하다. 이 회장은 “선별포장업 인증을 받은 업체 수도 부족하고 포장의무가 농가·유통상인 모두에게 적용돼 유통상인이 농가에 포장의무를 떠넘기면 농가는 수억원을 들여서 선별포장기를 바꿔야 한다”며 “식약처는 관련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농가에만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 농식품부가 추진하는 계란유통센터 전국 확대 시점(2022년)까지 시행령 적용을 유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북대 류경선 교수(동물자원과학과)는 “계란유통센터를 중심으로 냉장유통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비위생적인 계란 유통과 유통상인의 가격 농단 관행이 개선될 수 있다”며 “산란일자 표기나 선별포장업처럼 근시안적인 대책이 아니라 양계농가가 안전한 계란 생산을 위해 비용을 투입하는 만큼 제값 받고 거래할 수 있는 투명한 유통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계일보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